[오마이뉴스] 아흔넷 할망의 존엄을 사수하는 방법
작성자 : 관리자 2023.01.31

[2023년 1월 27일]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897143&CMPT_CD=SEARCH

 

 

제주도에 계시는 김건향 할머님의 건강과 여생을 응원합니다.

또한, 할머님의 일상에서 삶에 대한 소중한 기사를 작성해 주신 김지원 기자님 감사합니다.

 

(주)에이엠이 임직원 일동

 

 

 

 

 

 

 

 

 

 

아흔넷 할망이 존엄을 사수하는 방법

'요양원'에 가고 싶지 않은 노인의 몸부림... 그 복잡성을 이해하는 법

23.01.27 07:03l최종 업데이트 23.01.27 07:03l 김지원(peterpen)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인간은 존엄하다. 이 말을 의심해 본 적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너무 당연해서, 의심할 여지가 없어서 그래서 평소에는 나의 존엄을 주장할 일이 없다. 결핍과 부재의 상황에 마주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인지한다. 지금까지 누려왔던 그것이 본래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것을.

"인간은 존엄하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 임마누엘 칸트

존엄이란 인간이 태어나면서 본디 주어지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이 세상을 가만히 보면 사회가 인정하는 대상에 한해 실질적 존엄이 부여되는 것이 아닌가란 생각을 한다. 존엄의 결핍과 부재는 단지 불편함으로 치환되지 않는다. 그건 살아 있다는 생명의 가치가 손상되는 일이다.

극단적인 상황이지만 실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상황에서 우리는 무자비한 죽음을 목격한다. 이 사회가 유지되는 이유이자 성립 토대인 '생명의 가치'마저 무색해진다. 흔히 전쟁에 비유되는 삶에서도 존엄이란 얼마나 깨지기 쉬운 상상의 산물인가.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사람이 수단으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치매 걸린 노인이 요양원에 들어가 시스템에 의해 여생을 소진하는 상황에서 존엄은 쉽게 빼앗긴다.

공간과 존엄
 
할머니 손은 주름이 많이 졌지만 세월에 마모되어 보드랍다.
▲ 할머니와 손녀 할머니 손은 주름이 많이 졌지만 세월에 마모되어 보드랍다.
ⓒ 김지원 

아흔넷인 나의 할머니는 고집이 세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시골에 계신 것이 마음 쓰여 서울에 와서 함께 살자고 회유했으나 할머니께서는 본인의 친구와 일상이 있는 그곳을 떠나지 않으시겠다는 확고한 입장을 표명하셨다. 생각해 보면 서울에서 모시고 살겠다는 건 서울 사는 우리의 입장에서 편한 선택지였다. 할머니의 94년 인생은 전부 그곳에 있으니까.

이처럼 어디서 사는지는 한 사람의 존엄에 영향을 끼친다. 내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지, 내 인적 네트워크를 유지할 수 있는지는 곧 내가 살아가는 것이자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는 지역뿐 아니라 공간 자체도 마찬가지다. 할머니 동네에는 아흔 넘은 할머니들이 많이 계신다. 금번 연휴에는 할머니 그리고 할머니 친구 분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아흔 넘은 노인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고독사와 요양원에 가는 것. 할머니들께선 요양원을 시설이라고 부르는데 자식들이 공무원과 의사인, 소위 자식 농사 잘 지었다는 아무개 할망도 결국 시설에 갔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나누는 할머니들의 목소리로 시설에 간 할망에 대한 가여운 마음과, 본인은 절대 요양원에 가지 않겠다는 의지와 내가 나를 잘 책임져야 한다는 대단한 각오들이 전해진다.

물론 도심에 있는 좋은 요양원은 생활편의를 신경 쓰고 고급 서비스를 제공하는 입주시스템처럼 되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서비스를 누리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할머니들께서 생각하는 요양원은 존엄을 박탈당하는 "시설"일 뿐이다. 처음으로 할머니의 입장에서 요양원을 바라보았다. 내가 먹고 싶을 때 먹고 싶은 걸 먹지 못하고 시간표에 맞춰 식사를 해야 한다. 거동이 불편하니 내가 원할 때 바깥공기를 쐬지 못하고 시혜적인 서비스처럼 제공될 때만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일상의 대부분이 내 의지가 아닌 시스템에 맡겨지고 시설과 시스템에 갇힌 채 여생을 소진한다는 두려움. 그래서 나의 할머니는 본인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절대 요양원을 가지 않겠다고 하셨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의 뜻을 존중해 앞으로도 요양원을 고려하지 않기로 했다.

배설과 존엄

나이가 들면 밤에 화장실 가는 것이 위험한 일이 된다. 실제로 밤에 화장실에 가다가 넘어져 다치거나 사망하는 노인의 사례가 많다고 한다. 할머니와 지내는 며칠 동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면 하룻밤에도 수차례 오줌을 누러 가야 한다. 항이뇨호르몬이 줄어들고 방광의 기능이 떨어지면서 배설을 내 맘대로 통제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노화라는 것은 신체적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아진다는 점에서 아기와 비슷해진다.

야간뇨는 화장실 가는 횟수가 늘어나는 번거로움으로 끝나지 않는다. 야간뇨를 겪는 당사자와 그의 보호자(또는 반려자)의 수면 질을 낮춘다. 깊은 잠을 잘 수가 없고 이는 삶의 전반에 영향을 준다. 야간뇨가 있는 사람에게서 우울증이 3~6배 이상 발생한다는 연구도 있다. 그러나 야간뇨를 겪는 노인은 불편함보다 불편한 존엄의 문제에 봉착한다. 대개는 야간뇨의 대안으로 화장실까지 멀리 가지 않도록 요강을 쓰거나 이동식 변기를 사용한다. 그런데 밤새 쌓인 배설물, 그것이 인간 존엄에 위해를 가한다.

아이들도 이불에 오줌을 싸면 혼나는 두려움과 함께 창피함을 느낀다. 좀 더 커서 사회에 나가게 되면 내 배설물을 남에게 보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은 수치다. 그런데 더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면 이 수치심을 받아들여야 하는 때가 온다. 요강 또는 이동식 변기에 본인이 밤새 축적한 오줌을 누군가가 비워준다. 타인에게 본인의 배설물을 보여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 심리적 갈등을 겪는다. 그것을 할머니와 엄마의 갈등을 통해 보았다.

할머니는 본인의 오줌통을 엄마가 비우는 게 민망하셨던지 엄마가 아침밥을 차리는 도중 몰래 오줌통을 비우러 가시다 방에 오줌을 흘리셨다. 통을 비우러 왔다가 방에 오줌이 흘린 걸 본 엄마는 앞으로는 본인이 비울테니 앞으로는 그냥 두라고 하셨고, 할머니는 본인이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셨다. 

할머니를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과 본인의 존엄을 지키려는 할머니의 마음 모두가 이해가 갔다. 젊은 때는 당연하게 작동하는 신체 덕분에 알기 어렵지만 배설을 통제하기 어려워지는 순간, 세월이라는 이름 앞에 존엄을 빼앗긴다. 생리적 욕구를 통제하는 능력이 이 얼마나 존엄한 능력인가를 깨닫는다.
 
야간뇨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이동식 변기를 장만했다
▲ 이동식 변기를 장만하다 야간뇨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이동식 변기를 장만했다
ⓒ 김지원 


돈과 죽음과 존엄

많은 자식들이 연로한 부모에게 그 돈 다 들고 저승 갈 거 아닌데 왜 이리 아끼시냐고 말을 한다. 자식들에게 줄 생각 말고 살아 계실 적에 당신에게 다 쓰시라고 부모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에게는 그 말이 들어오지 않는다. 본인이 언제 죽을지 모를 뿐더러 돈이 없으면 존엄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생 전체를 통해 느껴왔기 때문이다.

언제가 삶의 끝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경제력이 떨어진 채 여생을 살아야 한다는 공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대단한 것이었다. 노인들이 끝까지 돈에 대한 절약과 검소를 놓지 못하는 것은 비단 살아온 습관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많은 드라마와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노년에는 자식보다 돈이 필요하다. 자식을 믿지만 혹시 모를 버림받을 두려움에 마지막까지 돈 돈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 내가 나를 먹여 살릴 수 있는 경제력은 나이가 들어서도 놓지 못하는 존엄의 수단이다.

이제는 편히 사셔도 될 텐데 억척같이 돈을 아끼는 할머니를 보며 죽음으로 다가가는 우리가 존엄을 사수하려 노력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영정사진을 미리 준비하는 것도 그 일환일 것이다. 나의 할아버지께서는 생전에 본인의 장례식과 답례품까지 직접 준비하셨다. 마지막까지 본인의 존엄을 지키고 싶으셨던 할아버지셨다.

할머니께서는 이렇게 먹고 자고를 반복하는 삶이 지겹다고 하시며 너무 오래 살까 봐 두렵다고 하신다. 그러나 또 죽고 싶은 것은 아니다. 진실의 반대가 꼭 거짓이 아니듯 그 복잡성을 이해하면 어떤 심정인지 이해하게 된다. 죽음에 가까워진 이가 본인의 존엄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이 지난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을 가까이에서 보며 존엄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이라서 무조건적으로 존엄하다는 말이 무색해진 세상이다. 본인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사람은 매일 분투한다. 국가 시스템에 의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가족과 친구는 존엄을 보장하진 못해도 그 분투가 덜 힘들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존재가 아닐까. 노년에 그런 존재가 있다면 축복이고, 아직 시간이 있다면 미래에 서로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해 지금의 삶을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실체는 없지만 끝까지 지키고 싶은 그것, 존엄을 위해서.